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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 화가들은 실물을 그대로 그리는 화풍을 벗어나려고 시도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의 효과를 화폭에 담으려 했고, 칸딘스키와 클레는 음악의 리듬과 멜로디를 화폭에 담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피카소는 더욱 새로운 혁신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하나의 관점이 아닌 다양한 관점에서 본 형상을 화폭에 담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큐비즘(=입체파, 입체주의)을 대표하는 미술가이며 회화, 조각, 도예, 디자인 등 다양한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한 20세기 현대미술 최고의 거장입니다. 피카소 이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현대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예술가입니다. 큐비즘은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판도를 완전히 바꾼 예술 운동입니다. 큐비즘은 단일 관점이 아닌, 다중 관점에서 동시에 형상을 묘사하려는 시도였으며 기존의 전통적 관점을 벗어나는 혁신적인 생각의 완성이었습니다. 아래에서 피카소가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시작한 '아비뇽의 여인들'을 출품한 때까지의 예술적 성장 과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피카소의 어린 시절과 첫 번째 전시회
1881년 스페인 말라가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릴 적엔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하여 학습능력이 매우 저조했으나, 말을 배우기 전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일찍이 그림에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이에 화가이자 미술 교사인 아버지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인 후원을 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사용한 단어가 그림과 관련 있는 '연필'이라는 단어였다고 하며, 10세 때는 화가인 아버지의 실력을 능가했다고 하니 그의 천부적 재능을 엿볼 수 있습니다. 1895년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여 순수예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896년작 '첫 영성체'는 피카소의 15세 때 작품으로 그의 어릴 적 그림 실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이미 고전주의 화풍의 정점을 화폭에 보여줍니다. 1897년 마드리드 왕립 예술학교 입학했으나 학교에는 잘 안 나갔다고 합니다. 대신에 주로 박물관에서 벨라스케스, 고야, 엘 그레코 등 옛 화가들 그림을 스스로 공부했습니다. 1899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친구들과 어울리며 프랑스 아방가르드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자유분방함과 뚜렷한 개성을 배우게 되는 시기였습니다. 1900년 19세의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뒷골목에 있는 '네 마리 고양이'라는 술집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150점의 데생들이 전시되었으며 대부분 예술가 친구들의 모습을 스케치한 작품이었습니다.
청색 시대와 장밋빛 시대
1900년 프랑스 파리의 전시회에 작품이 걸린 것을 계기로 친구 카사게마스와 처음으로 파리에 방문합니다. 2개월간 파리에 머물며 후기 인상파, 상징주의, 아르누보 등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그림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후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오가다 1904년에 파리에 정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자유와 꿈, 화려함을 경험하고 가난한 젊은 예술가의 거리인 몽마르트의 허름한 아파트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절친한 친구 카사헤마스의 죽음, 가난한 생활, 아직 인정받지 못한 작품들로 외로운 시기를 보냅니다. 이때의 작품은 주로 무거운 청색으로 표현되었고 깊은 차가움이 느껴지는 작품을 많이 그립니다. 피카소의 청색 시대(1901~1904)로 일컬어지는 시기입니다. 작품으로는 '장님의 식사', '삶', 안젤 페르난데즈 데 소토의 초상', '팔짱을 끼고 있는 여인' 등이 있습니다. 1905년 무렵부터 피카소의 작품은 푸른빛의 차가움이 점차 사라지고 장밋빛의 따뜻함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춥고 외롭고 우울한 푸른빛을 걷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도 첫사랑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시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리에서 만난 페르낭드는 스페인에서 온 외로운 피카소에게 핑크빛 감정과 행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녀를 만난 후부터 작품의 색감이 완전히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주로 붉은색, 주황색, 분홍색 톤으로 페르낭드와 함께 본 곡마단의 모습을 주로 많이 그립니다. 세련된 장밋빛 색감이 나는 붉은 톤으로 어릿광대와 곡예사 등 서커스를 즐겨 그렸으므로 어릿광대 시대라고도 불립니다. 광대의 알록달록한 체크무늬 의상도 이 시대에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작품으로는 '곡예사 가족', '할리퀸의 가족' 등이 있습니다.
세잔의 영향과 새로운 창조
1906년에 피카소는 조르주 브라크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해 나갑니다. 두 사람은 세잔의 작품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피카소는 세잔의 대회고전을 보고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합니다. 그는 "세잔은 내게 유일한 스승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세잔을 존경했습니다. 세잔은 자연의 대상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화풍을 개척했습니다. 소재나 주제보다 사물이 지닌 형태에 초점을 두고 모든 사물을 조형적으로 해석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피카소는 세잔의 그림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사물을 기본적인 조형 요소로 분해하고 그것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형태로 다시 만들어 내는 데까지 이릅니다. 전통적인 원근법과 시점 등을 무시하고 여러 시점에서 본 것을 하나의 화면에 재구성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입체파 작품들은 형체, 사물의 조합 방식, 공간 등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색을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입체파의 발전과정을 세분화하여 입체파 초기인 1907~1911년의 경향을 ‘분석적 입체파’, 1912년 이후부터 선보인 각종 오브제와 종이 등을 작품에 활용한 ‘종합적 입체파’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아비뇽의 처녀들. 피카소의 도전장.
1907년에 피카소의 초기 걸작인 '아비뇽의 처녀들(=여인들)'을 발표합니다. 그림에는 다섯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이 중 두 명은 아프리카 특유의 가면을 쓴 듯한 얼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피카소가 아프리카 조각의 조형성에도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조각과 고대의 미술을 연상시키는 왜곡된 얼굴과 신체를 도발적인 여성들의 포즈를 통해 혁신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특징으로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입체파가 탄생하여 폭발하기 직전의 응축된 기운이 모인 시작점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미술사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이 작품의 3차원적인 형태를 입체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해체하여, 2차원의 캔버스 위에 재구성합니다. 이런 혁신적 조형방식은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유지된 전통 회화 양식을 무너뜨리는 놀라운 시도였던 것입니다. 피카소는 새로운 기법인 중석적인 어두운 색조와 대조적이고 강렬한 색의 충돌을 사용하여 긴장감을 만들어 내었고, 선을 강하고 뚜렷하게 표현하여 전통적인 방식의 깊이감과 공간감의 진부함을 강렬히 거부하였습니다. 작품의 여성들은 겹쳐진 형태나 평면화된 형식으로 색다르게 표현되었습니다. 여인들의 눈, 코, 입, 과 몸은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이 동시에 존재하고, 몇몇 얼굴은 어린이가 그려놓은 것 같이 단순하고, 몇몇은 괴물을 그린 듯 이상하게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미화된 표현을 극도로 왜곡해서 기존의 화풍과 다르고 낯설게 표현하였고, 여성의 몸과 성적인 욕망, 여성을 표현하는 전통적 미화방식을 벗어난 원시적이고 도발적인 표현을 완성하였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파격은 피카소가 미술사에 던진 강렬한 도전장으로 영원히 남았습니다.